
프로야구 출범 30주년을 맞아 레전드 올스타 베스트 10이 선정되었다. 최다득표를 한 ‘헐크’ 이만수, ‘국보급 투수’ 선동렬, ‘악바리’ 박정태를 비롯해, 한대화, 양준혁, 장효조, 김재박, 이순철, 김기태. 이름을 들으면 가슴이 뛰고, 별명을 떠올리면 어제의 그라운드가 오늘처럼 펼쳐지는, 기꺼이 전설이라 말하기에 주저함이 없을 스타들이다.
전설의 탄생
전설은 어떻게 만들어질까. 첫 번째 필요조건은 기록이다. 숫자로 객관화된 그들의 기록은 압도적이고 물론 위대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위대한 선수가 ‘전설’이 되기 위해서는 이야기가 필요하다. 선동렬이 몸을 풀면 상대팀이 경기를 포기했다는, 박정태가 ‘오늘은 꼭 이겨야 한다’는 한 마디에 플레이오프 승부가 뒤집혔다는, 일본을 상대로 뛰어 올랐던 김재박의 기적 같은 개구리 번트, 그리고 한대화의 역전 쓰리런 홈런 같은, 그야말로 전설 같은 이야기들 말이다. 마지막으로 전설을 완성시키는 건 시간의 힘이다. 전설 같은 이야기에 세월의 무게가 더해지고, 사람들의 입을 타고, 때로 흐릿해진 기억의 두께까지 덧입혀지면, 그 때의 ‘마치 전설 같은 이야기’들은 비로소 전설이 되는 것이다.

비록 30주년 레전드 올스타에는 포함되지 않았지만, 레전드가 될 수밖에 없는 선수들이 있다. 박찬호, 이종범, 이승엽 같은 선수들이다. IMF때 모든 국민들에게 희망을 준 코리안 특급, 신인 한국시리즈 MVP를 시작으로 역대 최강 해태 타이거즈의 우승 청부사였던 바람의 아들, 그리고 타자라는 이름에 처음으로 ‘국민’을 붙게 했던 선수. 그들의 기록도, 이야기도 전설적이지만 이들은 현재 진행형이기에 아직 전설이 되지는 못한다. 다만, 분명 전설로 남을, 현재일 뿐이다.
‘국민 타자’ 이승엽은 특히 전설의 조건인 강렬한 기록과 기적 같은 이야기의 주인공이다. 8회 말의 사나이. 마쓰자카를 상대로 뽑아낸 시드니올림픽 동메달 결정전의 8회 결승타. 일본의 자존심을 꿇게 했던 2006 WBC- 또 하나의 ‘도쿄대첩’의 주인공. 한국 프로야구 최초의 50홈런, 아시아 신기록 56홈런. 꿈같았던 대구구장의 잠자리채 물결과 베이징 올림픽의 기적 같던 홈런까지. 그리고 그가 선사한 이야기는 하나가 더 있다.

국민 타자의 눈물
아시아 홈런 기록을 세운 대한민국의 국민 타자는 이듬해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아시아 최고라는 자부심을 가지고도 메이저리그에 진출하는 일은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2004년 스프링캠프가 끝나고 다저스에서 제시했던 액수는 ‘국민 타자’가 받아들이기에 어려운 수준이었다. 이승엽의 메이저리그 도전기는 선수 한 명의 도전일 뿐 아니라 대한민국 야구의 도전이었다. 야구 종주국 메이저리그의 벽은 그처럼 높았고, 국민 타자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자존심도 상처받았다.
그로부터 2년이 흘렀다. 이승엽은 다저스 대신 선택했던 소속팀 지바 롯데 마린스를 재팬시리즈 우승으로 이끌었고, 이제 2006년 월드베이스볼 클래식에 출정한 대한민국의 4번 타자가 되었다. 그리고 또 하나의 도쿄대첩, 아시아 예선 일본전 그가 터뜨렸던 도쿄돔의 8회 역전 투런 홈런은 이치로의 30년 발언을 딛고 대한민국 야구의 자존심을 유감없이 세워준 하나의 사건이었다.

2006년 월드베이스볼 클래식은 불합리한 구조의 대회였다. 개최국 미국의 결승 진출과 우승을 만들기 위해 본선에서 야구 강팀인 쿠바, 도미니카 공화국, 푸에르토리코를 같은 조에 억지로 밀어 넣고 자국 팀은 상대적으로 쉬운(처음에는 그렇다고 생각했던) 한국과 일본, 멕시코와 같은 조에 배치시켰으니 말이다. 국제 공인 대회라고 하기에는 메이저리그 사무국의 이익과 대회 흥행, 시청률이 우선한 이벤트 성격이 너무 강한 대회였다.
그러나 미국의 오만했던 야망은 일본과의 첫 경기부터 삐걱대기 시작했다. 일본의 3루 주자 태그-업 상황을 오심으로 뒤집고 4대3 한 점차 승리를 거두었지만 야구 종주국의 자존심은 심각하게 상해버린 뒤였다. 반면 이어지는 경기에서 대한민국은 이승엽의 대회 4호 홈런이 터졌고, 그렇게 멕시코마저 격침시킨 대한민국 야구 대표팀은 파죽의 4연승을 달린다. 이제 다음은 대한민국과 미국의 대결이었다.
다윗과 골리앗
4연승의 팀과 위기의 팀의 대결. 야구는 흐름의 경기이긴 하지만, 이름값은 무시 못 할 변수이다. 누가 보기에도 승리는 한쪽으로, 그것도 위기의 팀 쪽으로 치우쳐 있었다. 메이저리그 올스타, 미국 야구 대표팀. 벅 마르티네즈가 이끄는 이 올스타 팀이 대한민국을 상대로 내민 로스터에는 올스타 외야수 버논 웰스가 1번 타자, 데릭 지터가 2번, 켄 그리피 주니어가 3번, 알렉스 로드리게스가 4번, 치퍼 존스가 5번 타자였다. 뒤이어 제이슨 베리텍, 마크 테셰이라, 맷 홀리데이가 이어지는 꿈의 라인업에 선발 투수로는 신인왕에 빛나는 ‘폭주 기관차’ 돈트렐 윌리스가 나섰다.

돈트렐 윌리스가 던진 패스트볼은 그러나, 1회부터 이승엽에게 걸렸다. 그들은 한 때 메이저리그로부터 홀대 당했던 아시아의 사자에 대해서 전혀 모르고 있었다. 이승엽이 가볍게 받아친 공은 담장을 훌쩍 넘어갔다. 선제 투런 홈런. 이승엽의 대회 5호 홈런이었다. 그제야 메이저리그 올스타 팀은 이 경기의 심각함을 깨달았다. 대한민국 야구팀의 실력은, 진짜였다.
미국이 만회 한 점, 다시 한국이 추가 한 점을 내고 3대 1의 상황, 한국은 선발 손민한이 1실점 한 후, 3이닝을 마치고 내려갔다. 미국으로서는 본격적인 추격을 시작해야 할 상황. 그러나 4회 말 대한민국은 다시 스코어링 포지션에 주자를 내보냈고, 대회 홈런 선두에 빛나는 이승엽이 다시 타석에 들어섰다.
대한민국 야구 역사상 최고의 장면
그러나 모두의 눈을 의심하는 장면이 그때 펼쳐졌다. 벅 마르티네스 감독의 선택은, 이승엽의 고의사구였다. 추격의 타이밍에 만난 추가 실점에 대한 부담은 상당하지만, 경기는 아직 4회 말에 불과한 상황이었고, 그들은 메이저리그 올스타 팀이었으며, 투수는 메이저리거 댄 휠러였다. 상대는 그들이 이름도 잘 알지 못하던 아시아의 한 선수였을 뿐이었다. 그것도 실력 부족을 이유로 2년 전에 문전 박대했던 선수였다. 그러나 결국 메이저리그의 선택은, 그를 피해 달아나는 방법이었다.
제이슨 베리텍이 일어나 왼팔을 옆으로 뻗어 볼을 빼도록 주문했다. 타격 자세를 취하지 않은채 당당하게 선 이승엽의 모습과 그를 경원한 휠러의 뒷모습이 오버랩 됐다. 메이저리그의 굴욕. 그것은 분명 대한민국 야구 역사상 최고의 순간이라 부를만 했다. 이승엽은 천천히 1루로 걸어 나갔고 우리 방송 캐스터와 해설위원은 흥분의 탄성을, ESPN 캐스터는 탄식의 한숨을 내뱉었다.
그리고 이어진 최희섭의 타구가 엔젤스타디움의 우측 담장을 넘어갔다. 쓰리런 홈런. 이제 점수는 7대 1이 되었고 주관 방송사인 ESPN에서는 의미심장한 자막을 내보냈다. 이번 대회 콜드게임 규정을 친절하게 설명해주는 자막이었다. 콜드게임의 가능성이 생겼다는 것. 메이저리그 올스타 팀은 대한민국 야구팀에 너무나 큰 실력 차이를 절감하고 중간에 백기 투항할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는 것을 전 세계 야구팬들에게 알려주는 자막이었다.

전설은 때로 신화가 된다
오릭스 버팔로스 하위 타순에 들어있는 이승엽의 이름을 보는 일은 그래서 불편하다. 전 세계 야구팬들을 놀라게 했던, 메이저리그 올스타 팀이 두려워 도망치던 그의 위용을 찾아보기도 이제는 쉽지가 않다. 몇 년 전의 엄지 수술은 그의 완벽한 밸런스에 선명한 금을 내버렸고, 이후 부진한 성적을 스스로 삭여내던 인고의 시간이 그에게 당당함을 앗아가 버렸다.
그러나 국민타자가 2군을 오간다는 이유로 무참히 욕하는 사람들을 바라보고만 있기에는 그는 너무나도 멋진 전설 같은 순간들을 우리에게 선사했다. 베이징 올림픽 준결승, 8회 역전 투런 홈런을 터뜨린 후 마음고생 끝에 내비친 그의 눈물이 아직도 선명하다. 그는 대한민국 야구 사상 가장 멋진 순간을 선사한 사나이며, 무엇보다 이 전설 같은 선수는 아직 현재 진행형이다. 진정한 노력은 배반하지 않는다고 믿으며 여전히 기적 같은 부활을 꿈꾸며 땀을 흘리고 있는 이승엽. 전설이 기적 같은 순간을 만날 때, 전설은 마침내 신화가 된다.





덧글
역사관심 2011/08/16 12:58 # 답글
정말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벌써 잊어가던 기억이었는데, 이런 WBC 경기들은 DVD로 묶어서라도 판해하면 합니다.물론 역대 한국시리즈도...
홍차도둑 2011/08/16 15:02 #
이전에 하도 케이블TV에서 베이징 올림픽만 틀어주길레 불평글을 썼었지요. 이후 방송을 통해 알아보니...이놈의 빌어먹을 공중파에서 중계를 하는데에만 신경쓰고 값이 비싸네 어쩌네만 하면서 이 부분들을 계약을 전혀 안했답니다.
그래서 이걸 구하려면 방법은...불법으로 올라간 그 어둠의 경로이거나..아님 미국이나 일본 등에서 이때의 공식 라이센스를 가지고 만든 회사의 것을 사지 않는 한 불가능하다더군요...
컨텐츠의 중요성조차 모르는 이놈의 실정...T_T
역사관심 2011/08/16 15:11 #
허허허;; 기가 차는 이야기군요.
오엠지 2011/08/16 13:11 # 답글
이승엽이야기군요 요즘은 뭐하는지...
이세리나 2011/08/16 15:30 # 답글
아아.. 06년 WBC 정말 대단했죠 ㅠ_ㅠ ..WBC의 어이없는 대진표만 아니었어도 한국은 06년과 09년 다 우승했을텐데..
27살그냥남자 2011/08/17 17:50 # 답글
06년 WBC 당시 군대에 있었지만 악착같이 챙겨봤습니다.[<<당시 이등병] 얼마전 이승엽의 홈런은 많은 걸 생각하게 해줬습니다. 폼은 순간이지만 클래스는 영원하다. 던가요...그는 다시 불사조처럼 부활할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이승엽을 조롱했던 사람들은 입을 다물고 숨어들겠죠...